모리타니안

모리타니안


스릴러 같은 훌륭한 연출, 찝찝한 엔딩

영화 줄거리는 한줄로도 요약이 가능하다.

9/11 테러 주동자로 낙인찍혀 억울하게 14년 동안 옥살이를 한 슬라히의 이야기

보통 이런 영화는 철저하게 변호인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변호하는 사람의 정의와 올바름을 강조하고, 대립하는 검사 및 정치인들의 추악함을 악으로 규정하여 이분법적인 구도로 연출을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모리타니안은 피의자 슬라히에 중점을 두고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그가 체포를 당하는 장면부터 수사 과정 및 수감 생활 내용을 하나의 타임라인으로 진행시키지 않고 필요할 때 마다 단편적인 씬 형식으로 나눠서 전개를 시킨다. 또한 변호인들의 “사생활”에 대한 부분이 많이 나타나지 않아 불필요한 전개가 없고 진행이 깔끔하게 이루어 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영화에선 “완전한 악”으로 규정할 만한 세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굳이 정하자면 상부의 명령으로 가혹행위를 진행한 “닐”이 있겠지만, 출연 빈도가 적으며, 결국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 스투가 슬라히 수사자료 원본을 열람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준다. 영화의 연출이 선과 악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고, 슬라히의 이야기 그리고 그의 극복 과정에 초점을 두고 있어서 몰입이 더 쉬웠다.


신념

14년 동안 느꼈을 억울함과 분노, 그리고 온갖 가혹행위를 견딜 수 있는 슬라히의 정신력은 어디서 왔을까?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슬라히는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온 사람과 대화를 하게 되며, 그를 “마르세유”라고 부른다. 두 인물은 모두 무슬림이었지만, 마르세유는 이미 수감된 후, 기도하는 것을 멈췄으며, 부인의 부고 소식을 전해 듣고 자살을 하게 됐다. 반면, 슬라히는 매번 기도를 하며 종교에 대한 신념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고 영어를 공부하며 의미있는 활동을 계속해나갔다. 똑같은 상황에서 한명은 버티지 못했고, 슬라히는 살아남았다. 신에 대한 슬라히의 굳은 신념은 희망이 들어설 수 있게 하였고, 그는 고향을 떠올리며 14년의 세월을 이겨냈다.

슬라히의 변호를 맡은 인권변호사 낸시는 “테러리스트를 변호하는 배신자”로 낙인 찍혔지만,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며, 재판 받을 권리가 있다는 신념 하나로 변호를 계속 맡았다.

“Everybody has the right to counsel”

조수 테리가 슬라히의 거짓 자백 문서를 확인하고 그의 변호를 주저하자, 낸시는 “You can’t win a case if you can’t believe your own shit” 라고 신념 앞에 흔들리는 그녀를 질책했다. 낸시는 슬라히의 9/11 테러의 주동 여부에 관계 없이, 그녀가 믿는 법을 수호하고자 신념을 유지했다.


정치와 여론의 희생양, 그리고 강대국의 폭력성

100% 실화 기반인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화성 연쇄살인 8차 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20년간 억울하게 수감생활을 했던 윤성여씨의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법에 정치와 군중심리가 더해지면 생기는 scapegoat 들의 비극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케이스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윤성여씨는 경찰 수사의 무능함을 반증하기 위해, 미국 정부는 9.11 테러의 책임을 전가할 인물이 필요했기에 고문을 통해 거짓 자백을 유도하는 비인도적인 짓을 했다.

유튜브에선 흔히 “사이다 영상”이라고 불리는 미국 주 법원들의 재판 영상들이 종종 보인다.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에게 “정의”를 실현하는 과정은 특히 사필귀정, 인과응보와 같은 사자성어에 익숙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통괘함을 선사해준다. 하지만 이러한 영상에 흔히 달리는 댓글들은 “우리나라의 법”을 깎아 내리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기반으로 발전하고 성장해온 국가도 정치적 성공을 위해서는 야만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심지어 미국 정부는 현재까지 피해자 슬라히에게 어떠한 사과 및 보상도 진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슬라히의 해방은 관타나모에 수감된 몇 백명의 인원들 중에 특이한 사례이다. 그 나머지 인원들 중에서는 결백한 사람들이 아예 없었을까?


자유를 위한 용서

마지막 장면에서 슬라히는 법정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My captorsr cannot forgive me for something that I have never done. But I am trying to forgive. I want to forgive.”

“In Arabic, the word for free and the word for forgiveness is the same word”

“I forgive everyone for the ill-treatment and injustice that I have suffered”

14년 동안 그를 감금하고 가혹행위와 온갖 고문으로 거짓 자백을 유도한 정부를 “용서”했다고 한다. 진정한 자유를 위해 모든 것을 용서한다는 그의 심정을 어느정도 이해는 할 수 있었으나, 물 없이 고구마를 몇개 먹은 기분이었다. 윤성여씨 또한 자신을 범인으로 몰아갔던 담당 형사들에게 “용서하고 싶다”라고 밝혔다.

왜 죄 없고 선한 사람들은 고통받고 행복과 자유를 위해 용서를 해야할까? 과연 슬라히와 윤성여씨에게 가혹행위를 가하고 희생양으로 삼기를 결정한 권한자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낄까? 애초에 그런 가책을 느꼈더라면 이러한 선택을 했었을까? 결국 최후에는 그 누구도 이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고 흐지부지 됐다. 씁쓸한 엔딩으로서는 최고인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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