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열한 거리
중학교 시절, 우리 집 근처 상가에는 비디오 대여 방이 있었다. 상점 유리창에는 다양한 포스터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포스터들 중 하나는 “비열한 거리” 였다. 양복과 다친 손, 그 손을 대충 감은 붕대, 그리고 담배까지 끼운 손가락과 주름진 그의 이마는 멋있었다. 극강의 “마초”이미지가 포스터에서 뿜어져 나왔고 이를 동경했던 나는 성인이 되면 영화를 꼭 봐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15년이 흐르고 나서야, 볼만한 느와르 영화를 찾아보다 다시 본 포스터로 옛날의 다짐을 떠올리게 됐다.
제목에서도 나왔듯이, 영화의 핵심 주제는 “비열함”이다. 자신의 이득과 생존을 위해서는 의리도, 우정도 없는 등장인물들을 보여주면서 배신이 판을 치는 비열한 세계를 영상에 담았다.
(!!스포주의!!)
보통의 느와르물은 “의리”, “복수” 그리고 “사랑”을 주제로 이야기가 대개 전개 된다. “배신”이 없지는 않지만, 있다면 철저한 명분으로 설계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비열한 거리에서는 철저하게 자신의 이권으로 배신이 일어난다.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딱 두가지만 알면 돼. 나한테 필요한 사람이 누군지, 그 사람이 뭘 필요로 하는지…”
황회장의 말을 다시 곱씹어 보자면, 성공을 위해서라면 더이상 나에게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은 가감없이 내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형 동생간의 의리, 같이 오래 밥을 먹은 식구들의 의미도 “필요”에 의해 쉽게 무색해져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상철을 제낀 병두, 병두를 배신한 종수 그리고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면 철저히 배제시키는 황회장을 본다면, 병두를 포함하여 그가 몸담은 거리는 정말 비열하다. 하지만 조폭들만 비열한 것이 아니다. 친구의 비밀을 이용해 성공을 꾀했던 민호도, 외도를 했던 검사도 비열하다고 볼 수 있다. 직업과 상관없이 우리가 사는 세계는 비열하다는 것을 어느정도 시사했다고 생각한다.
“민호야, 너 이번에는 말이여. 진짜 의리에 죽고 사는 찐한 건달 얘기 한번 만들어봐라”
병두는 어쩌면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세계에 의리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느끼고 영화로라도 실재했으면 이란 바램을 친구인 민호에게 부탁한 것일 수도 있다.
액션과 것멑만 잔뜩 들어간 다른 B급 느와르물 보다는 매력적인 영화였다.